엄천사의 역사와 전설


김윤수(대전대학교 철학과 객원교수)


     1. 머리말


  요사이 역사라고 불리는 것에 전설과 창작이 너무 많이 개재되어 있다. 소설가가 쓴 소설을 조금 지나면 역사라고 하고 버젓이 위인전에 수록된다. 동의보감의 허준 소설이 그렇고 《화랑세기》가 그렇다. 주민들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어낸 이야기가 세월이 흘러 책에 기록되면 역사가 되고 역사라고 우긴다. 산청 구형왕의 전설과 전설 기록이 그렇다. 역사는 역사가가 기록한 역사서에 있는 기록이 바른 것이다. 역사가도 틀리고 빠뜨리고 왜곡시킨 것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 불신하고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역사라고 혼재시켜선 곤란하다. 지어낸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전설은 역사가 아니지만 지어낸 시점의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점에서만 가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역사라고 억지 주장하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자양분이 되니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다.

  필자가 2006년에 《함양문화》에 발표한 <함양의 구산선문과 오교양종>에서 함양의 사찰 역사에 대해 고찰해본바 사찰역사에도 역사와 전설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안국사로 조선 태종 4년 천태종 고승 행호조사가 창건한 것을 신라 태종 무열왕 4년으로 소급시키니 이것은 의도적이든 착각이든 역사가 아니다. 너무 범람하는 지어낸 이야기에 무비판적으로 함몰되어 역사라고 고집하며 주장해선 안 되는 것이다.

  역사 기록도 그 안에 진정한 역사와 전설이 개재되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을 구별하는 법은 사료비판으로 진위를 변별해내는 것인데 다른 참고 자료가 부족하면 공자님의 문헌부족의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에 있던 엄천사에도 역사와 전설이 혼재되어 전해진다. 엄천사의 역사는 <해동 강우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 흥폐 사적>이 기본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그 번역문을 수록한다.


     2. <해동 강우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 흥폐 사적> (抄譯)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는 신라의 결언선사(決言禪師)가 창건한 것이다. 당나라 건부(乾符) 10년(건부는 6년에 그치고 이때는 中和 3년임) 계묘(신라 헌강왕9년,883) 봄에 헌강대왕이 화암사(華岩寺:화엄사)에 사신을 보내어 결언선사를 초빙하였다. 선사가 이르자 왕이 예로써 대우하고 분부하였다.

"궁궐에 선사를 초청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도로써 나라를 다스렸지요. 법흥왕의 도리사, 진흥왕의 황룡사, 무열왕의 감은사, 애장왕의 해인사, 경문왕의 숭복사는 다 선왕을 위해 지은 것입니다. 때때로 그 절에 불공을 드려 선왕의 명복을 빌고 국운의 연장을 기원했으니 이것은 대대로 계승하는 대업입니다. 내가 그 일을 잇지 못한다면 선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선사를 번거롭게 이곳에 오게 한 것은 선사를 통해 그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듣건대 해동의 명산이 많지만 지리산이 가장 높고 깊다고 하니 선사가 그곳에 가서 터를 잡고 절을 지어 영원히 우리 선고왕(先考王)을 위해 명복을 비는 원찰로 만들어준다면 그 자비와 보시가 클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사가 명을 받들어 지리산에 와서 산을 따라 맥을 점치고 시내를 따라 거슬러올라가다 마침내 이 땅을 얻었다. 보고를 받은 왕은 백성을 동원하고 조세를 돌려 쓰게 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같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절이 지어지자 왕은 엄천사라 하사하였다. 그뜻은 엄히 계율을 지켜 한량없는 복을 받는 것이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낙성식의 법회를 열 때 왕도 친히 행차하여 선고왕을 위하여 불공을 드렸다. 드디어 결언대사를 보정사(輔政師)로 삼고 사라국사(娑羅國師)라고 칭하였고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

  왕비 김씨가 곡식 천 섬을 희사하여 죽은 아우를 위해 명복을 빌고 최치원(885년 귀국)에게 명하여 발원문을 짓게 하였다.

  고려 시대에 절이 퇴락했으나 보수하지 못하였다. 남송 건염(建炎) 2년 무신,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1128)에 고승 성선(性宣) 대사가 강을 건너 서유(西遊)하다가 이 절에 유숙하고는 절의 퇴락상을 보고 발분하여 중수할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시주자를 구하여 중수하니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성선대사는 강법사(講法師)가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절은 다 불에 소실되었다. 강희(康熙) 25년 정묘 우리 임금님 즉위 14년(숙종13,1687)에 안양사(安養寺:지금의 문정리 법화사) 승려 인욱(印旭)과 혜문(惠文) 등이 안양사가 험고한 데 있어 왕래가 어렵다며 평탄한 엄천사 터로 절을 옮기자고 대중에게 동의를 얻고 군수와 관찰사에게 진정하여 승낙을 받아 수백 명의 승려들이 재물을 모으고 공역을 담당하여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 땅은  향교의 수세지(收稅地)로 편입되어 있어 절을 지을 수 없는 형편이라 세월이 천연되었다.

  경오년(숙종16,1690) 봄에 동의를 얻어 절을 중창하게 되었다. 벽암 각성(碧巖覺性:1575-1660)의 손자인 침허(枕虛)의 아들 죽계당(竹溪堂) 승현(僧絢) 대사가 지휘하여 중건하였다. 옛 주초를 인하여 18동(棟) 100간의 건물을 지었다. 임신년(1692) 봄에 왕명이 내려 4결(結)이 면세전으로 되었다.

  승민(勝敏)이 사적을 지어달라고 청하여 강희 32년 계유(1693,숙종19) 2월 5일에 무가암(無可菴)의 탄부(坦夫)가 사적기를 지었다. 이후 48년 기축(1709,숙종35) 6월 2일에 시와 서문을 지었다. (시서 생략)


     2.1 이 사적에 등장하는 신라시대의 결언선사(決言禪師)나 고려시대의 성선(性宣) 대사는 다 역사에 나오는 실존인물이고 시대도 부합한다. 그런데 결언선사의 창건 연대에 문제가 있는데, 당나라 건부(乾符) 10년(건부는 6년에 그치고 이때는 中和 3년임) 계묘(신라 헌강왕9년,883)라고 되어 있는 이 사료만 보아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 다음의 자료를 본다.


    3. 사굴산문 엄천사 개청


  낭원대사(朗圓大師) 개청 (開淸, 834~930)의 속성은 김씨이며 진한(辰韓)의 계림인으로 흥덕왕 10년(835) 4월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유차(遊車)이고, 신승(神僧)이 금인(金印)을 주고 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 모습이 남보다 뛰어나 8세 때 유학(儒學)을 공부하다가 어려서부터 입도(入道)하기를 간구하여 부친의 허락을 받고 25세(859, 헌안왕 3)에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로 출가하여 *정행 스님으로부터 개청이라는 법명을 받고 화엄학을 익혔다.

  이어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옥축일음(玉軸一音)을 듣고 금강삼매(金剛三昧)의 진리를 얻었다고 한다. 구산선문의 사굴산문의 시조 오대산의 통효대사(通曉大師;*범일)를 뵙고 수행을 했다. 경문왕도 그의 덕행이 높음을 듣고 왕도(王道)가 위급할 때 돕도록 국사의 예(禮)로 대우했으며, 보현산사에서 입적하니 속년(俗年) 96세, 승납 72세였다. 후에 낭원대사라 시호(諡號)하고 탑명(塔名)은 오진(悟眞)이라 했다. 탑비의 원래 명칭은 고려국명주보현산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지탑비명(高麗國溟州普賢山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之塔碑銘) 보물 제192호(최언위 글, 구족달 글씨)이다.

*정행법사(正行法師) : 화엄사 사적에 의하면 경문왕 10년(870)에 잡화(雜花:화엄)의 묘지(妙旨)를 전하고 낭원(郞圓)이 청강(聽講)하였다고 하였다.

*범일(梵日 810~889) : 성은 김(金). 시호 통효(通曉).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829년(흥덕왕 4)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당(唐)나라에 가 제안(濟安)에게 6년간 사사하였다. 844년(문성왕 6년) 탄압으로 승려를 도태하고 절을 파괴하는 법난(法難)을 만나 상산(商山)에 피신, 선정(禪定)하다가 847년(문성왕 9) 귀국, 백달산(白達山)에서 좌선하고 굴산사(崛山寺)에서 40년을 보내면서 경문(景文)·헌강(憲康)·정강(定康)의 3왕으로부터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어 주기를 권유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수도와 불경연구에만 전념하였다.


     3.1 고려 최언위(崔彦撝 868~944)가 지은 오진탑비문에 대사는 대중 8년(854, 문성왕 16) 4월 15일에 탄생하고 동광 8년(930, 경순왕4) 9월 24일에 적멸하였다고 하면서 속년 96세, 법랍 72세라 하였다. 대중(大中:당 선종 연호) 말년(13, 859) 신라 헌안왕 3년(859)에 개청이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했으니 이때 개청은 대중 8년생으로 치면 겨우 6세이니 의문점이 있다. 96세설을 기준으로 하고 25세에 수계한 것으로 쳐도 878년(헌강왕 4)이니 국립 수계 사찰인 엄천사는 이때도 이미 큰 사찰이었던 것이다. 개청의 전기와 당나라 건부(乾符) 10년(건부는 6년에 그치고 이때는 中和 3년임) 계묘(신라 헌강왕9년,883)에 창건한 것이라는 엄천사사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정밀히 대조 연구할 필요가 있다.


     4. 고려시대의 역사


*남송 건염(建炎) 2년 무신,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1128)에 고승 성선(性宣) 대사가 강을 건너 서유(西遊)하다가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절터에 있던 엄천사에 유숙하고는 절의 퇴락상을 보고 발분하여 중수할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시주자를 구하여 중수하니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성선대사는 강법사(講法師)가 되었다. <해동 강우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 흥폐 사적>

*고려 인종 시대 진억(津億)이 지리산 오대사(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절터에 수정사(水精社)란 절을 지었다. 송(宋)의 선화(宣和) 5년(1123, 고려 인종 1) 계묘(癸卯)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1129, 고려 인종 7) 기유(癸酉) 10월에 준공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3일간 베풀었다. 엄천사(嚴川寺)의 수좌(首座)인 성선(性宣)을 청하여 경문을 강설하게 하였다. 임금께서는 동남해안찰부사 기거사인 지제고(東南海按察副使起居舍人知制誥)인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분향을 행하고, 인하여 은 2백냥을 내리시어 이를 칭찬하였다. 《동문선》<지리산수정사기>

  성선을 초청하여 강경하게 한 수정사주 진억은 9세에 출가하여 법상종(자은종)의 본찰 현화사에 들어가 혜덕왕사 소현에게 공부하고 대선에 합격하였다. 명산에 들어가 결사를 이루어 수행하고자 지리산 오대사의 폐사에 수정사를 건설하고 선교의 승려와 일반 신도의 호응으로 입사 희망자가 3천이나 되었다. 1129년의 낙성법회에는 고려 인종이 윤언이를 보내어 분향하고 은 2백 냥을 내려 칭찬하기도 할 만큼 수정사는 교화를 크게 이루었다. 주: 김남윤, 고려중기 불교와 법상종, 한국사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2

  성선이 수좌이니 이는 교종의 고승이다. 고려 광종(光宗) 때 과거제(科擧制)가 실시되자 승려에게 승과시를 보여 조선 초기까지 실시하였다.

  승과에는 교종(敎宗)의 승려를 선발하는 교종선(敎宗選)과 선종(禪宗)의 승려를 선발하는 선종선(禪宗選)으로 나누어 이에 합격한 자는 선 ·교(禪敎)의 구별 없이 대선(大選)이라는 초급 법계를 받고, 대덕(大德) ·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까지 차례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선 ·교에 따라 달라 교종계(敎宗系)는 수좌(首座) ·승통(僧統)의 호를, 선종계(禪宗系)는 선사(禪師) ·대선사(大禪師)의 호를 받았다.

  혜생 승통이 엄천사에 가는 것을 전송할 때 목은 이색(1328-1396)이 지은 시를 보면 <牧隱詩稿卷之三十三 送惠生僧統住嚴川: 儒釋相非久。誰知我獨親。跡雖爲佛子。心不廢人倫。歲月萱堂靜。雲山紺宇新。講餘時定省。風俗想還淳> 엄천사는 고려 중기에는 수좌가, 말기에는  승통이 주석한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대사는 조선 시대에도 절이 건재하였으니 남명 조식 선생이 오대사를 읊은 시도 있다. 지금은 국선도에 팔려 백궁선원이란 수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5. 조선 초기의 역사


  조선 태조 5년(1396)에 보면, 당시 慈恩宗의 都僧統이었던 宗林이라는 승려가 前判事인 尹安鼎과 함께 板橋院을 설치하고서 병자들을 간호하면서 음식물까지도 제공하는 등 빈민구제 사업을 실시했다는 내용 등이 이를 말해준다. 《太祖康獻大王實錄》 卷第九, 三月 辛酉條. 주: 이만, 朝鮮時代의  法相敎學思想, 한국유식사상사, 장경각, 2000

태종 7년(1407) 정해 12월 의정부(議政府)에서 명찰(名刹)로써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에 대신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지난 해에 사사(寺社)를 혁파하여 없앨 때에 삼한(三韓) 이래의 대가람(大伽藍)이 도리어 태거(汰去)하는 예에 들고, 망하여 폐지된 사사(寺社)에 주지(住持)를 차하(差下)하는 일이 간혹 있었으니, 승도(僧徒)가 어찌 원망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만일 산수(山水) 좋은 곳의 대가람(大伽藍)을 택하여 망하여 폐지된 사원(寺院)에 대신한다면, 거의 승도들로 하여금 거주할 곳을 얻게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러 고을의 자복사를 모두 명찰(名刹)로 대신하였는데,

조계종(曹溪宗)에 양주(梁州)의 통도사(通度寺) 등등 감음(減陰)의 영각사(靈覺寺) 등등

천태종(天台宗)에 등등

화엄종(華嚴宗)에 등등

자은종(慈恩宗)에 승령(僧嶺)의 관음사(觀音寺) 등등 남포(藍浦)의 성주사(聖住寺) 등등 함양(咸陽)의 엄천사(嚴川寺) 등등

중신종(中神宗)에 등등

총남종(摠南宗)에 등등

시흥종(始興宗)에 등등. 태종실록.

  이 때의 함양의 지리산 명찰로는 자은종의 엄천사가 있었고 덕유산 명찰로 조계종의 영각사가 있은 것이다.


     6. 성종 5년(1474) 함양군수 점필재 김종직 선생 관영 다원(茶園)을 조성하고 지은 시 <다원 2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


관영 차밭(官營茶園) 조성터(造成址) 기념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목민관으로서 군민이 나지도 않는 차를 공납하느라고 온갖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시고 엄천사 북쪽에 관영 차밭을 조성하여 고통을 덜어 주었으니 선생의 높은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다.

 

 

   1998년 11월

   함 양 군 수


후면


          차 밭(茶園)


                        점필재 김종직 시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케 하고자 하나

신라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또한 기쁘다.


대숲 밖 거친 동산 1백여 평의 언덕

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무이차같은 명다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欲奉靈苗壽聖君

新羅遺種久無聞

如今힐得頭流下 힐才+吉+頁

且喜吾民寬一分


竹外荒園數畝坡

紫英鳥嘴幾時誇

但令民療心頭肉

不要籠加粟粒芽


後學 金侖秀 譯

後學 李昌九 書


함양문화원

한국차문화협회

가천문화재단

일선김씨대종회

 

     7. 엄천사는 인목대비의 원찰- 인목대비 아우 천도문

  

고전국역총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69권 > 한죽당섭필 하 寒竹堂涉筆下 

청장관은 함양 사근도 찰방을 지낸 실학사대가인 아정 이덕무의 당호이다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죽당섭필 하 寒竹堂涉筆下 

 

    엄천(嚴川)의 고적 


계묘년(정조 7, 1783) 6월에 두류산(頭流山)을 구경갔다가 엄천사(嚴川寺)에서 쉬면서 이 절의 고적(古蹟)을 물으니 중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은 아우의 명복을 비는 글이 실린 책 한 권을 내보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들으니 '법신(法身) 주D-001은 원만하여 사람을 비춰 주는데 마치 거울을 대할 때 피로를 잊는 것과 같고 혜력은 두루 통하여 만물을 이끌어 주는데 마치 큰 거리에서 마시기를 기다리는 것주D-002과도 같다. 그러므로 거울을 보면 얼굴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구분되고 술잔을 들면 그릇의 깊고 얕음을 알 수 있듯이, 교화하는 방편이 치우침이 없고 수행하는 중생이 의탁할 데가 있어, 죽어서는 억울함을 풀게 되고 살아서는 고액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물론, 능히 효제(孝悌)의 정성을 다하면 쉽게 자비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정성을 다한다면 부처가 어찌 제자를 속이겠습니까? 제자의 자매는 일찍이 불행한 화난으로 깊은 한을 안고 있습니다. 부모를 잃은 뒤 믿을 데 없어 마음이 무너지고 의지할 데 없어 피눈물을 짓는 데다가 형제까지 잃은 슬픔을 더하였으니 그리는 정 갑절이나 더합니다. 하늘의 꾸짖음을 피할 길이 없고 땅속으로도 피할 길 없습니다. 어찌 유경(劉景)이 주대(周代)의 종통을 밝히고 이홍(李弘)이 위조(魏朝)의 예를 가리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제자가 궁중에서 여공(女功 방직ㆍ재봉 등의 여자들의 일)을 힘쓰고 왕가(王家)에서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여 왔으나 이제는 기국(杞國)의 근심주D-003이 깊어지고 초(楚)……(원문 2자 빠졌음)……그만되었으니, 우두커니 홀로 있음에 내 몸이 있는 듯 없는 듯 정신이 아득합니다. 그러나 무슨 말로도 충정을 진술할 수 없으므로 부질없이 비녀를 뽑고 채색 옷을 벗고는 죄인으로 자처할 뿐입니다.


집안의 박복함을 돌아보건대, 이는 실로 길 가는 사람들도 다 슬프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제 여생은 한이 있고 원한은 다함이 없으니, 의해(義海 불법(佛法)을 말한다)에 마음을 쏟지 않으면 어떻게 전생의 인연을 밝히겠으며 법림(法林)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저승의 공덕(功德)을 짓겠습니까?


이제 죽은 아우를 엄천사(嚴川寺)에 추복(追福 죽은 자를 위해 공덕을 지어 복을 얻게 함)하기 위하여 삼가 강원(講院) 증축 비용으로 벼 1천 섬을 희사합니다. 또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자세히 물어서 의심을 밝히는 것'주D-004은 옛 성인이 말씀한 바이고 후생이 힘써야 할 일입니다. 감히 얼마 안 되는 재물을 여러 법류(法流)들에게 보시(布施)하는 것이 한 줌 흙으로 태산에 보태는 것과 같아 비록 부끄럽사오나 이로 말미암아 법해(法海)에 귀의하여 넓은 법당에 학승(學僧)을 모아놓고 청정한 자리에서 상외(象外)의 종지(宗旨)를 설(說)하기를 원합니다.


또 삼가 원하옵기는 죽은 아우가 번뇌의 굴레를 해탈하고 법회(法會)에 올라서 공덕은 사중(四衆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를 말한다)에 나눠주어 장자(長者)의 좋은 손님이 되고 법(法)은 대승(大乘)을 체득하여 불가(佛家)의 좋은 벗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 시방 세계(十方世界)의 용렬한 근기(根器)와 만겁(萬劫)의 혼탁한 무리들이 아우와 함께 반야(般若)의 배를 타고 보리(菩提)의 언덕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주 D-001] '법신(法身) : 3신(身)의 하나. 법은 진여(眞如). 법계(法界)의 이(理)와 일치한 부처의 진신(眞身)을 말한다.

[주 D-002] 큰 거리에서 마시기를 기다리는 것 : 큰 거리에 술동이를 놓아두고 지나는 사람들이 따라 마시기를 기다리는 것. 이는 성인(聖人)의 도(道)를 비유한 말이다.《淮南子 卷十 繆稱訓》

[주 D-003] 이제는 기국(杞國)의 근심 : 기(杞) 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어쩌나 하고 크게 걱정하였다는 고사. 기우(杞憂).

[주 D-004]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자세히 물어서 의심을 밝히는 것' :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문언전(文言傳)에 보인다.


     8. 조선 후기의 역사


1774년 영조 50년 갑오 추파 홍유(秋波泓宥 1718-1774) 산청의 심적암(深寂菴)에서 서거. 추파는 함양 벽송사 고승 경암 응윤(鏡巖應允 1743-1804)의 스승이다. 일찍이 생전에 함양 휴천면 동호리 소재 엄천사(嚴泉寺) 종각 상량문을 지은 적이 있다.추파집.


1783년 정조 7년 계묘 6월에 사근도 찰방 아정 이덕무가 두류산(頭流山)을 구경갔다가 엄천사(嚴川寺)에서 쉬면서 이 절의 고적(古蹟)을 물으니 중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은 아우의 명복을 비는 글이 실린 책 한 권을 내보였다.


1797년 정조 21년 정사 감모재 노광두:1772(영조 48)∼1859(철종 10)가 26세 때 엄천사에 이우하다.《感慕齋集》 年譜 26세 正祖 21년 丁巳 1797 4월 移做于嚴川寺.


     9. 엄천사 종각 상량문   嚴泉寺鐘閣上樑文


                                   추파홍유(秋波泓宥, 1718~1774)


勢扼嶺湖咸陽      형세상 영남과 호남을 누르는 함양은    

爲都護府之鎭勝    도호부의 요지이며 승지이다.

占智異嚴泉        지리산의 엄천을 차지하여

得大伽藍之名      큰 절의 이름을 얻었다.

孤雲子之所棲      고운선생이 깃들었던 곳이고

法祐師之攸創      법우스님이 창건한 곳이다.

千峯簇攅          천 개의 봉우리가 모였고

一水縈紆          한 줄기 물이 감돈다.

巖巒之雄高        바위가 웅장하고 높으니

則雁宕風斯下      안탕산도 이만 못하리.

道場之明淨        도량이 밝고 맑으니

而鷲靈美豈專      영축산만이 신령함과 아름다움을 독점하리오.

旣奠法殿之宏規    이미 법당의 큰 규모를 정했으니

爰諏鐘樓之繼搆    이어 종루를 지을 것을 묻는다.

筮陰陽於筠璞      오균과 곽박에게 길일을 점치고

勑杗桷於倕般      수와 공수반에게 재목을 부탁하였다.

輸岱山之奇材      태산의 좋은 목재를 실어오고

寫崑丘之美石      곤륜산의 고운 돌을 실어왔다.

事皆從而順矣      일이 다 따라서 순조로우니

不日成之          며칠 안 되어 이루었다.

衆亦樂而爲焉      무리들도 즐거이 하기를

如雲集也          구름이 모이듯 하였다.

一閣功訖          한 채 누각의 공사가 끝나니

六偉唱騰          육위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兒郞偉抛梁東      으라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자

鏜鏜鞳鞳曙暉中    댕그랑댕그랑 새벽 햇빛 속에  

人間猶作牽情夢    인간들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으니

一鼓惺惺喚主翁    일개 북으로 깨우쳐 주인공을 부르다

兒郞偉抛梁南      으라차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자

鞳鞳鏜鏜午餉甘    댕그랑댕그랑 점심이 맛있으니

莫使木魚鳴飯後    목어를 식사 뒤에 울리지 말게 하여

山中飢客盡來參    산속의 주린 손들 다 와 참석케 하라.

兒郞偉抛梁西      으라차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자

鏜鏜鞳鞳日輪低    댕그랑댕그랑 해가 낮게 깔리니

日輪方向金天去    해는 바야흐로 서쪽 하늘로 향하나

䓗嶺雪山路不迷    총령과 설산의 길은 헤매지 않는다.

兒郞偉抛梁北      으라차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자

鞳鞳鏜鏜時夜寂    댕그랑댕그랑 때는 적막한 밤

吳質欲消黑業纏    오질이 악업을 소멸시키고자 하면

不眠應誦彌陀百    자지 못할 때 아미타주를 백 번 외어야 하리.

兒郞偉抛梁上      으라차 들보를 위쪽으로 던지자

鏜鏜鞳鞳飛淸響    댕그랑댕그랑 맑은 소리 날리어 

隨風散入白雲間    바람 따라 흩어져 흰구름 사이로 들어가니

諸佛翩然來髴髣    여러 부처님들 훌쩍 눈에 선하게 내림하시는 듯

兒郞偉抛梁下      으라차 들보를 아래쪽으로 던지자

鞳鞳鏜鏜長不啞    댕그랑댕그랑 길이 입다물지 말고

三十三天廿八星    삼십삼천 이십팔수

晨昏不失鳴蘭若    아침 저녁 때 잃지 말고 절에서 울려라.

伏願上樑之後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

神祐一寺          신들은 한 절을 도우시어

聲聞十方          소리가 시방에 들리고

帀磬鑼而揚靈      경쇠와 징과 함께 신령함을 드날리어

千魔辟易          온갖 마귀들 피하게 하고

侑唄誦而娛佛      범패 소리를 도와 부처님을 즐겁게 하여

百祿多將          온갖 복을 많이 받게 하소서.


   <<秋波集>> 卷三


역주


1. 엄천사는 원문에서 샘 천자를 썼으나 내 천자가 옳다. 지금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절터 마을이 엄천사 터이며 절의 주춧돌이 산재해 있고 앞에는 엄천강이 흐른다.

2. 함양군은 영조 5년(1729)에 도호부로 승격하고 정조 12년(1788)에 다시 군으로 환원되었는데 이 글이 지어진 시기는 함양도호부 시절이었다.

3. 오균은 당나라 때의 도사이고 곽박은 진(晉)나라 때의 술사로 풍수지리학의 창시자이다. 둘 다 점을 잘 쳤다.

4. 수는 중국 황제 시대의, 공수반은 중국 노나라 시대의 유명한 기술자이다.

5. 상량문 가운데 아랑위로 시작되는 부분은 노래로서 동서 남북 상하 여섯 절구 시로 이루어졌다.

6. 총령은 파미르 고원이고 설산은 히말라야산맥인데 총령은 달마조사가 넘어와 중국에 선불교를 전했고 설산은 석가모니가 도를 깨친 곳이므로 다 불교를 상징한다.

7. 오질은 오강(吳剛)이라고도 한다. 전한 시대 사람으로 신선을 배우다가 잘못을 저질러 달 속의 계수나무를 베는 벌을 받았다. 계수나무는 높이가 5백 척(1척은 30cm)이나 되는데 도끼로 찍으면 갈라졌다가 도로 붙어버렸다. 오질은 자지 못하고 부질없이 계속 찍어댔다. 마치 그리스 신화의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의 바위와 유사하다.

8. 추파 홍유 스님은 숙종 44년에 태어나 영조 50년에 입적하였다.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산청 심적암에 주석하다가 입적하여 영정이 거기에 봉안되었다. 벽송사 스님인 경암 응윤 스님이 그 제자로서 그의 <<추파집>>을 정조 4년(1780)에 간행하였다. (함양문학 6호, 1997.12)


     10. 엄천사의 전설


  이능화란 전설을 수집하여 역사 기록에 남긴 것은 하나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전설을 남기면 역사는 아니지만 역사인의 창작정신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엄천사가 한국무당의 성지가 된 전설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지만 엄천서 주변 함양인들의 자랑인 것이다. 전설상 한국 무당의 아버지가 엄천사의 법우화상이다. 법우화상이 낯선 인물이라 그런지 나중에는 함양에 익숙한 인물인 마적도사와 결합되어 한 사람 두 이름의 존재가 되는 전설이 생겨나게 되었다. 통일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4~661) 때 실존 인물이라는 설이 있는 마적도사가 마적사를 창건하였다 하니 마적사의 역사가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적도사가 법우화상과 동일인물이라면 당나라 건부(乾符) 10년(건부는 6년에 그치고 이때는 中和 3년임) 계묘(신라 헌강왕9년,883)에 창건되었다는 엄천사의 법우화상과는 시대차가 너무 난다. 전설은 역사 개념이 없는 것이다.


     11. 법우화상(法祐和尙)


  무당이 굿을 할 때 한 손에 금방울을 흔들고 한 손에 채색 부채를 들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너울너울 춤추며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 또한 법우화상을 부른다. 이것은 대개 유래가 있다. 지리산의 엄천사(嚴川寺)에 법우화상이 있었는데 매우 도가 높았다. 어느 날 한가로이 있을 때 갑자기 보니 산골짝의 냇물이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불어났다. 그 근원을 찾다가 천왕봉 꼭대기에 이르러 키 크고 힘센 한 여인을 보았다. 스스로 말하기를,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서 <성모천왕은 곧 지리산신이다. 고려 때 박전지(朴全之)가 지은 용암사(龍巖寺) 중창기에 보인다.> 인간계에 귀양 내려왔는데 그대와 인연이 있어 마침 물로 도술을 부려 스스로 중매한 것이다.”고 하였다. 드디어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살았다. 딸 8명을 낳아 자손이 번성하였고, 무술(巫術)을 가르쳤다. <지금 산 아래에 백무촌(百巫村)이 있다고 한다.> 금방울을 흔들고 채색 부채로 춤추며 아미타불을 부르고 법우화상을 부르면서 동네방네를 다니며 무업(巫業)을 일삼았다. 그러므로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한번 지리산 꼭대기에 이르러 성모천왕에게 기도하여 접신(接神)한다고 한다.《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제15장》이능화(李能和 1869~1944) 지음.

*백무촌은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백무동으로 현재는 백무동(白霧洞 또는 百武洞)이라 표기한다. 고전 판소리 전집의 변강쇠가에 보이는 변강쇠가 나무한 백모촌(百母村)이 바로 이곳이다. 변강쇠가는 함양을 배경으로 하는 고전판소리문학이다.


     12. 마적도사(馬跡道士)


  지금의 경남 함양군 휴천면 용유당소 근처에 마적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마적도사라는 법우화상이 살았다. 하루는 천왕봉에서 흘러내리는 엄천강에 구름 한 점 없는 청천 맑은 날인데도 붉은 황톳물이 홍수 져 내려가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강을 따라 올라가 보니 지리산 천왕봉의 천태산 마고할멈이 앉아 오줌을 누더란다. 화상은 이 여자가 바로 천생배필임을 알고 부부의 인연을 맺고 결혼을 하였다. 부부는 딸을 아흔 아흡이나 낳았는데 모두가 무당이 되었다. 즉 마고할멈인 어머니까지 합쳐 백 명의 무당이 되어 백무동이 생겨났고 그들이 조선 팔도에 흩어져 팔도 무당의 씨가 되었다고 한다.


     13. 호차(虎茶)

 

초엽 따서 상감님께 바치고

중엽 따서 부모님께 드리고

말엽 따서 남편에게 주고

늙은 잎은 차약 지어

봉지 봉지 담아 두고

우리 아이 배 아플 때

차약 먹여 병 고치고

무럭 무럭 자라나서

경상 감사 되어 주소.


 지리산 차나무 밭에 차잎을 따러 갔던 아이가 산속을 헤매다가 길을 잃었다.

 이때 동리로 내려오던 호랑이가 아이를 업고 산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호랑이 굴로 끌려간 아이는 기절을 했고 호랑이는 아이를 잡아먹으려다가 너무 어리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차마 해치기 안됐든지 아이의 얼굴에다 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도록 하고 함께 살아갈 양으로 아이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아이는 호랑이가 고마워서 차잎을 따다가 호랑이에게 주니 호랑이는 차잎을 맛있게 먹게 되었다.

 차잎을 먹다보니 아이와 호랑이는 친구가 되었고 차맛에 취한 호랑이는 원기가 왕성하여 아이에게 온갖 고기를 다 구해다 주었다.

 그후 호랑이는 아이를 집으로 내려 보내고 스스로 지리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던 아이가 살아오자 마을 사람들은 크게 놀라 그 이유를 물었더니 여차여차하여 이렇게 되었노라고 호랑이와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사람들은 호랑이가 즐겨 먹은 고로 호랑이 호자를 넣어 ‘호차’라고 불렀다고 한다.

 

     14. 엄천사의 동화 - 산신령이 된 호랑이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느 하루 경상도 땅 함양이란 고을에 덕망 높은 원님이 새로 부임을 했습니다. 함양은 웅장한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아주 아름다운 고장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차(茶)가 무척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각 고을의 원님들은 부임지에 도착하면 그 고장에서 나는 제일 좋은 차를 골라 한양 임금님께로 보내는 것이 신하로서의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원님이 알아보니 함양에는 이렇다 할 차나무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온이 얕은 산자락 아래여서 차나무가 자라기에는 조건이 맞지 않은 탓도 있었습니다.

“저 높고 넓은 지리산에 아무렴 차나무 하나가 없겠는가? 모두가 나서서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 보라.”

원님의 명을 받은 포졸들은 어쩔 수없이 온 산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를 며칠 째, 드디어 지리산 중턱에서 희귀한 차나무 한 그루가 발견 되었습니다. 당연히 포졸들은 그 차나무를 뿌리째 캐서 원님 앞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오! 어디에서 발견 하였는고?”

포졸 하나가 약간 망설이다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글쎄 이것이... 호랑이 똥밭에 솟아나 있었습니다요.”

“호랑이 똥?”

“예, 나으리.”

“오! 그렇다면 이건 필시 보통 차는 아니로다. 호랑이 똥이라... 음, 앞으로 이 차의 이름을 호차(虎茶)라고 부르도록 하자꾸나.”

이리하여 원님은 그 호차를 잘 심어 정성껏 가꾸도록 지시했고 이윽고 이듬해에는 차 잎을 따서 임금님께로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호차는 워낙에 차향이 깊고 맛이 뛰어나 임금님도 아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원님은 밭을 새로 일궈 호차를 대량으로 재배토록 명도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차나무의 주인이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지리산을 지키는 늙은 호랑이였던 것입니다. 스스로 거름을 주고 가꾸어 새순이 돋을 때마다 한 잎씩 따서 먹었는데 그만 차나무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필시 인간의 소행이라고 생각한 호랑이는 몹시도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난 호랑이는 밤중에 슬며시 마을로 내려와 잠자는 아이 하나를 덥석 물고는 다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동굴에 도착한 호랑이는 크게 입을 벌리고는 입맛을 쩝쩝 다셨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아이는 여전히 새근새근 자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잠시 자는 아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아무리 차나무를 훔쳐간 인간이 밉다 해도 티 없이 맑은 아이를 차마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아이를 돌려  보내지 않고 산중에 데리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호랑이가 자신을 해치지 않고 살려 준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의 말벗도 되어주며 함께 지내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아, 오늘따라 그 차향이 참으로 그립구나.”

호랑이는 그윽한 차 맛을 생각하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아이는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차나무를 도둑맞았다면 분명 마을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혼자 마을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을의 텃밭 여기저기를 유심히 살폈습니다. 마침내 아이는 한 밭에서 그 차나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몇 개의 차 잎을 따 산으로 올라온 아이는 호랑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호랑이는 크게 기뻐하며 그 차를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이가 새벽마다 차 잎을 따다 호랑이에게 전하기를 어느새 3년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늙은 호랑이가 아이를 조용히 불러 앉혔습니다.

“이제는 너도 네 부모에게로 돌아가도록 하여라.”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호랑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난 이제 늙어서 더는 살지 못할 것 같구나. 그러니 너도 산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

호랑이의 말이 떨어지자 아이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그날 밤, 늙은 호랑이는 엎드린 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이는 숨을 거둔 호랑이 옆에 앉아 한동안 슬피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아이의 눈앞에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호랑이 몸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연기처럼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얘야.” 

큰 지팡이를 든 노인이 불렀습니다.

“네가 따다 준 그 차 잎을 먹고 내가 이렇게 산신령이 되었구나. 이 모든 것이  다 너의 덕분이다.”

아이는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노인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너와 너희 마을을 잘 지켜 줄 터이니 너도 이제 집으로 내려가도록 하여라.”

하더니 구름을 불러 올라타고는 홀연히 높은 산위로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사라져가는 산신령을 향하여 큰절을 올리고는 산을 등지고 내려 왔습니다.

틀림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돌아오니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 모두는 놀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다시 마을로 돌아 온 아이는 늦은 나이였지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비록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였지만 하나를 알면 열을 깨닫는 총명함을 보이더니 곧 과거시험에도 장원으로 급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후로도 함양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속속 배출되면서 명망 높은 고장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해마다 풍년이 들어 사람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큰 기쁨으로 넘쳐흘렀습니다.

고을 사람들은 이 모두가 호차를 먹고 산신령이 된 지리산 호랑이의 덕분이라고 굳게 믿으며 늘 고마운 마음으로 살았다는 그런 이야깁니다. <끝>


2007년, 고향을 생각하며 지음.


출처: 정연균의 글방 http://dusrbs0324.egloos.com/9713410


     15. 맺음말


  엄천사가 신라시대 창건되어 국립 수계사찰로 번성하여 나중에 국사가 된 개청이 여기서 수계하였고 고려시대 고승 성선과 혜통이 주석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국가 지정 자복사로 역할하였다. 엄천사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근처에 나는 차나무로 인해 함양군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차밭 조성으로 역사에 유명해지게 되었다. 조선후기에도 고승 추파홍유가 엄천사 종각 상량문을 짓는 등 큰절로 존재하였다. 그런데 폐사과정을 적은 기록이 없어 역사의 대미를 장식할 길이 없다.

  엄천사가 유명하였으므로 엄천사는 한국 무당의 성지라는 전설이 생겨났고 호차 전설도 생겨났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에 동화까지 창작되었다. 동화나 전설이나 다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이다. 세월이 흘렀다고 전설상 이야기를 역사라고 생각해선 안될 것이다. 역사와 전설을 혼동하여 문화재 지정과 안내판, 위인전, 가문사(족보), 향토사 기술 등 역사적 기술을 일삼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역사기록에 있어 신중해야 할 일이다.